조화(造花)와 조화(調和)
드디어 전시가 끝났다.
작품 가지러 오신 분과 같이 축하해주러 오셨던 분들이 본의 아니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반출 일을 도와주셔서 한결 쉽게 끝낼 수 있었다.
작품을 떼고 포장을 하고 직접 반출하실 분들과 못 오시는 분들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와이어를 떼고 벽에 박힌 타카 심을 뽑고 와이어를 10개씩 묶어서 관리실에 전달했다. 그 사이 작품을 되가져갈 차량이 도착해서 작품들을 들고 계단을 올라 차에다 실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미술관 측에선 화환처리가 안되기 때문에 우리가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단체 전시엔 단체전 자체를 축하해 주는 화환이 있을 순 있는데 단체전 중 개인을 축하해 주는 화환은 처음이었다. 젊은(혹은 어린) 청년 작가로 전시 자체가 처음인 분이라 축하해 주는 분도 좀 과했고 축하를 받았을 작가분도 잘 몰랐을 거라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화환의 처리가 발목을 잡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보통은 화환을 가져다준 업체에서 전시가 끝난 뒤 수거를 해가거나 미술관을 청소해 주시는 분들에게 사례비를 드리면 대신 처리해 주시는 걸 경험상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리방법을 모색했다. 그런데 미술관 측에서는 대신 처리해 주는 건 없다고 했기 때문에 화환을 보내신 분께 연락을 해서 화환 업체에서 되가져 가실 수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연락을 드렸다. 그런데 화환을 보내신 분도 이런 경험이 없으셨는지 축하해 드린 작가분이 직접 가서 대신 처리를 하실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전시 경험이 거의 없는 그 작가분이 이걸 과연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와중에 차에는 짐이 거의 다 실렸고 곧 출발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환경미화원 아저씨께 화환의 처리 방법을 물었더니 분해하고 쓰레기 봉투에 담아서 저녁에 내어 놓으라고 말씀하셨다.
화환은 나무로 된 각목 뼈대와 플라스틱 재질의 커다란 잎들, 조화와 생화, 오아시스 네 덩이와 철사, 나무 꼬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작가분이 오신다고 해서 공구도 없이 이걸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결국 나는 사무실로 가져와서 내가 직접 분해해서 버리기로 결정했다. 화환을 보내신 분과 작가 분에게 연락을 드려서 상황을 설명 드렸고 그냥 돌아가시라고 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짐을 들여놓고 나서 화환을 분해하기 위해 공구를 챙기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미술관에서는 대충 봤기 때문에 별 감흥이 없었으나 막상 해체를 하려고 보니 뭔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사실 난 꽃다발을 주거나 받는 걸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짧은 축하를 위해 땅에서부터 강제로 뽑히고 잘리고 다듬어져 뭔가 화려하고 찬연한 순간만으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항상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꽃은 시들고 말라서 버려지고 만다. 뭔가 생명을 함부로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내 개인전을 할 때엔 반드시 당구장 표시와 함께 이렇게 홍보 글을 올린다.
※ 화환, 화분, 꽃다발 등은 정중히 사절합니다.
하지만 이건 단체전이고 단체전 축하의 의미로 받은 화환도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첫 전시 경험이고 누군가의 그 첫 전시 경험을 축하해 주는 화환이다.
그리고 난 이 전시의 실무 총괄을 맡은 사람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직접 화환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세심하게 화환을 바라본다. 오픈 첫날 봤던 그 화려했던 이미지는 아니다. 생화는 시들었지만 조화는 그대로여서 살아있는 것 같으면서도 죽은 것 같은 기묘한 생물 같다.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화환의 뒤로 돌아 앙상하고 엉성한 각목 뼈대를 살펴본다. 불편한 마음과는 반대로 머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체를 할지 순서를 정하고 있다.
철사를 끊고 꽃들이 꽂혀 있는 오아시스 덩어리들을 떼어 낸다. 그리고 다시 조화와 시든 생화를 뽑아낸 뒤 분리수거가 가능한 재료를 분리한다. 각목에 박힌 못들도 일일이 꼼꼼하게 뽑아낸다. 환경미화원 분이 혹시라도 못에 찔려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께서도 철수 작업을 같이 하셨지만 아들이 잔업 하는 게 좀 짠하셨는지 직접 톱을 들고 나오셔서 봉투에 담을 수 있는 길이로 각목들을 잘라 주셨다. 결국 쓰레기 봉투 세 장에 나눠담고 정리한 뒤 담배 한 대를 물었다. 비닐 틈 사이로 그리고 강제로 우겨 넣은 반투명한 비닐의 포장 빛 너머로 조화의 붉은 색과 노란색이 비쳤다. 또다시 뭔가 오묘한 기분이 들었고 마지막으로 사진 한 장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끝이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끝이 강제적인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십대까지는 영원한 무언가를 동경했었다.
그것은 형제간의 우애일수도 있었고 이성간의 사랑일 수도 있었고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에 대한 애정일수도 있었으며 키우던 병아리, 강아지나 비 오던 날 주워왔던 새끼 고양이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형제도, 키우던 동물들도 그리고 할머니나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나시는 것을 경험하며 영원보다는 아름다운 끝을 더 깊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내 개똥철학을 바꾸기 시작했다.
책이든 영상이든 난 연속물은 보지 않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는 도중에도 함께 일하던 친한 친구와 안 좋게 헤어지게 됐고 열정적으로 일했던 지사장님들과도 나름대로의 사정과 이유들로 이별과 만남을 수시로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내 나이 마흔 셋.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회사는 안정세였고 한편으로는 내가 앞으로의 10년 뒤에도 전단지 디자인 같은 비교적 젊은 디자이너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10년 후면 쉰셋인데 말이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될 때 그만두고 창작 작업을 하고자 막연히 생각하다 웹툰을 해야겠다라고 앞날을 계획하던 차였다. 앞으로의 10년이 또 같은 방식으로 내 삶의 패턴을 지배한다면 그것만큼 날 두렵게 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직업, 보직이나 직함의 경중 문제가 아닌 내가 정말 싫어하고 싫어한다고 생각해왔던 영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최근에 있었던 아끼는 사람들의 어떤 사건과 그들의 눈물로 인해 나의 결정에 혼란이 오고야 말았다.
어쩌면 내가 아름다운 끝이 더 중요하다라고 판단해 버린 근거엔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나 회피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헤어지기 싫다. 이별하기 싫다. 더 이상 상실감에 아프기 싫다라는 생각이 내 정신과 육체를 지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이든 끝이든, 삶이든 죽음이든 어쩌면 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별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도망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그저 끝을 위한 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꼈기 때문에 아팠고 사랑했기 때문에 아팠다. 그렇지만 아프지 않기 위한 강제적 끝맺음이 아니라 아픔, 슬픔, 고통과 죽음 모든 것을 품에 그리고 등에 지고 떠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희생’을 떠올려 본다.
오늘 난 그저 화환 하나를 정리했고 매년 해오던 단체 전시 하나를 다시 끝맺음 했을 뿐이다. 그 아름답고 찬연했던 빛이 쓰레기 봉투에 담기던 순간에 이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혹은 생경하게 떠오른 것은 어쩌면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이 주체적이지 못하고 흘러가는 대로 혹은 강제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휩쓸려온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아름다운 끝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쓰레기 봉투에 구겨 넣어지는 삶 보다는 땅에 뿌리를 박고 비바람과 뜨거운 햇빛과 매섭고 차가운 바람을 견뎌낸 뒤 다시 땅으로 돌아가길 염원한다. 그러나 끝을 위한 끝이 아닌 앞으로의 10년은 함께하는 사람들과 좀 더 이야기하고 좀 더 들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고루하고 원칙주의자적인 내 성격 상 잘 될 런진, 잘 할 수 있을 런진 모르겠지만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난 모자라고 부족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날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난 그들이 그리고 내가
아름다운 끝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진정으로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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